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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내면의 나로 향하는 여정

인간의 존엄성

by 풍요로운 마음부자 2021.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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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저는 겉으로는 모범생처럼 보였지만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는 왠지 겉도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성격이 유별나진 않았지만, 조용히 티나지 않게 투명인간처럼 지내고 싶어했던 아이였습니다.

아직도 생생한 고등학교 1학년 윤리 수업 시간. 몇 월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날짜는 정확히 30일이었습니다. 이름순으로 30번이던 저에게는 그다지 좋은 날은 아니었습니다. 수업시간마다 선생님들께서 '30번'을 외쳐댈 것이었으니까요. 그날 윤리 교과서에서 학습할 내용이 '인간의 존엄성'이었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예상대로 '30번'인 저를 부르셨습니다.

저에게 책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구구절절 4~5장에 걸쳐 서술된 내용 중 그 어디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이란 어쩌구저쩌구 이다'라는 문장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속으로 살짝 난감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없는 걸 없다고 말하려던 참이었으니까요. 성격상 곧이곧대로 말하는 편이라 그 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책을 다 읽었냐며 확인하시고는 저에게 '책에 인간의 존엄성의 정의가 어떻게 씌여 있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책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웃기 시작합니다. 그 아이들에게 저는 책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아이로 보였을테지만 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없었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버럭 소리를 지르십니다.

"뭐? 책에 없어? 그런 책 뭐하러 가지고 다녀? 쓰레기통에 갖다 버려!"

하지만 저는 곧바로 알아차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를 혼내려 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죠.

선생님께서는 다음으로 40번, 50번, 10번, 20번에 해당하는 아이들을 차례대로 일으켜 세우며 책에 인간의 존엄성을 뭐라고 써 놨냐며 물어보셨습니다. 아이들은 제각기 나름대로 말을 잘도 지어냈습니다.

20번 아이가 말을 끝내고 잠시 정적이 흐릅니다.

선생님께서는 인간의 존엄성이 어디에 있냐며 나머지 아이들에게 해당 페이지를 말해 보라며 하십니다.

아무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없었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인간의 존엄성은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40번, 50번, 10번, 20번 아이들은 그 수업시간 절반을 서서 수업을 들어야 했습니다. 없는 내용을 지어낸 죄가 컸던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렴, 청소년기의 창작욕구는 충분히 높이 평가받을만 한데도 윤리 선생님께서는 그 모습이 그다지 탐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교과서를 집필한 이들도 인간들이기에, 인간이 같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었던 걸까요. 어쨌거나 그 수업시간은 여전히 제 기억 속에 생생한 장면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저는 그날 윤리 수업 시간에서 인간의 존엄성 보다도 '나'라는 아이가 다른 아이들 눈에는 별종같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점이 오히려 신경쓰였습니다.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알지만 한창 예민하던 그 시기에는 그러한 경험 또한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오히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생활하고 싶어하는 저같은 아이에게는 더더욱 조심해야 하는 일이 추가된 셈이었습니다.

그렇게 어쩌면 '나'라는 세계에 대한 탐구는 오래 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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